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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와 질병, 유전자와의 상관관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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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와 질병, 유전자와의 상관관계

율남매네아빠 2021. 12. 13. 09:42

그러나 그 뒤로 더욱 커다란 바이러스들이 발견되었다. 2013년 엑스마르세유 대학교(버틀스가 미미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혀냈을 때에 재직하던 곳)의 장미셸 클라베리 연구진은 판도라바이러스(pandoravirus)라는 새로운 거대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유전자가 무려 2,500개나 되고, 그중 90퍼센트는 자연의 다른 어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세 번째 거대 바이러스인 피토바이러스(pithovirus)도 발견했다. 더욱 크고 그만큼 더 기이한 바이러스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발견된 거대 바이러스는 5개 집단이다.

 

모두 지구의 다른 모든 바이러스들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들끼리도 크게 다르다. 이런 기이하면서 이질적인 생명입자(bioparticle)가 세균역, 고세군역, 진핵생물역에 이어서 네 번째 생명의 영역(domain)이 존재한다.는 증거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진핵생물역은 우리 같은 복잡한 생물들을 모두 포함하는 범주이다. 미생물에 관한 한, 우리는 정말로 이제 겨우 알기 시작했을 뿐이다.

현대로 들어와서도 꽤 오랫동안 미생물처럼 작은 것이 우리에게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은 얼토당토않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독일의 미생물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1884년에 콜레라를 전적으로 바실루스(간균, 막대 모양의 세균)가 일으킨다고 발표했을 때, 당시의 저명하지만 의심 많은 막스 폰 페텐코퍼라는 동료 학자는 격렬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코흐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겠다며

작은 병에 든 바실루스를 꿀꺽 삼키는 시연회까지 열었다. 그 일로페텐코퍼가 심하게 앓음으로써 근거가 빈약한 자신의 반대 견해를철회하게 되었다면 훨씬 더 나은 일화가 되었겠지만, 그는 아무 일없이 멀쩡했다. 때로는 그런 일도 일어난다. 지금은 페텐코퍼가 과거에 콜레라에 걸린 적이 있어서 면역력이 얼마간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보다 덜 알려진 사실이 있는데, 그의 학생 두 명도 콜레라 추출액을 마셨다가 아주 심하게 앓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 일화는 이른바 세균론(germ theory)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을 지체시키는 역할을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콜레라나 다른 많은 흔한 질병들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치료제가 전혀 없었으니까."

물론 지금 코흐의 발견은 아주 잘 알려져 있으며, 발견자인 그의 이름도 널리 알려져있다. 그러나 종종 간과되는 점이 있는데, 작고 사소한 기여가 과학 발전에 얼마나엄청난 역할을 할 수 있는가이다. 아마 코흐 자신의 생산적인 연구실이야말로 그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었을 것이다.

 

점점 늘어나는 다양한 세균 표본을 배양하려니 연구실 공간이 점점 비좁아졌고 교차 오염의 가능성도 점점 커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코흐에게는 율리우스 리하르트 페트리라는 조수가 있었다. 그는 보호 뚜껑이 있는 얕은 접시를 고안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이 붙게 될 페트리 접시였다.

 

페트리 접시는 아주 작은 공간만 차지했고, 멸균되고 균일한 환경을 제공했으며, 교차오염의 위험을 사실상 제거했다. 그러나 아직 배양할 매체가 필요했다. 다양한 젤라틴을 시험했지만,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다가 다른 젊은 연구자의 미국인 아내인 패니 헤세가 한천을 써보라고 제안했다. 미국에 살 때 패니는할머니에게 한천으로 젤리를 만드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그러면 여름의 열기에도 녹지 않는다고 했다. 한천은 실험용으로도 완벽하게 적합했다. 이 두가지 발전이 없었다면, 코흐는 혁신적인 발견을 이루기까지 시간이 더 오래 걸렸거나아예 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페니실린이 등장하기 전까지, 어떤 경이로운 약에 가장 근접한 것- 독일의 면역학자 파울 에를리히가 1910년에 개발한 살바르산(Salvarsan)이었다. 그러나 살바르산은 매독을 비롯한 몇 가지 질병에만 효과가 있었고,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비소로만들었기 때문에 독성이 있었다. 게다가 치료를 하려면 50주일 넘게매주 1번씩 환자의 팔에 약 0.5리터의 용액을 주입해야 했다. 

 

정확히제대로 주입하지 않으면, 용액이 근육으로 새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면 몹시 고통스럽고 때로 심각한 부작용이 생기며, 팔을 절단해야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이 치료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의사는 유명해지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알렉산더 플레밍은 그 방면으로 가장큰 명성을 얻은 의사 중 한 명이었다.

플레밍이 우연히 페니실린을 발견한 이야기는 너무나 자주 들리지만, 이야기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그 발견 이야기가 처음으로온전한 형태로 나온 것은 1944년이었다. 그 일이 있은 지 15년이 흐른 뒤였고, 세부적인 사항들은 이미 모호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재구성하면 이렇게 될 것 같다. 알렉산더 플레밍은 런던의 세인트메리 병원에서 의학 연구자로 일하고 있었다. 1928년에 그가 휴가를 간 동안, 페니실륨속(Penicillium)의 곰팡이 홀씨가 연구실로 날아와서 그가 무심코 뚜껑을 닫지 않았던 페트리 접시에 내려앉았다.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 플레밍이 페트리 접시를 정리하지 않은 채 휴가를 떠났다는 것, 그해 여름 날씨가 (홀씨가 발아하기 딱좋게) 유달리 선선했다는 것, 느리게 자라는 곰팡이가 활동을 할 수있을 만큼 플레밍이 오래 떠나 있었다는 것이 이어진 덕분에 연구실로 돌아온 그는 그 페트리 접시에서 세균의 증식이 유달리 억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접시에 내려앉은 곰팡이가 아주 희귀한 종류여서 그 발견이 사실상 기적에 가깝다는 식의 이야기들도 종종 보이지만, 그 부분은 언론의 창작인 듯하다. 그 곰팡이는 사실 페니실륨 노타툼(Penicilium 170taturn)이었다. 지금은 학명이 페니실륨 크리소게눔(Penicillium clnsogenan)으로 바뀌었다.

 

런던에서 아주 흔한 곰팡이이므로, 홀씨 몇 개가 떠다니다가 그의 연구실로 들어가서 한천 배지에 내려앉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또 플레밍이 자신의 발견을 활용하지 못했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다른 이들이 그의 발견을 토대로 유용한 약물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흔하다.

 

어쨌거나 그것은 편협한 해석이다. 첫째, 플레밍은 그 곰팡이의 중요성을 알아차렸다.는 영예를 받아 마땅하다. 덜 주의 깊은 과학자였다면 그 접시를 그냥 내버렸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권위 있는 학술지에 충실하게 발표했고, 그 곰팡이를 항생제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도 적었다. 또 그는 그 발견을 유용한 약물로 전만하려는 시도도 얼마간 했지만 나중에 연구자들이 발견하게 되듯이 그 일은 기술적으로 까다로웠으며 그에게는 더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연구 과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에 매달릴 수가 없었다.

 

편협한 해석은 플레밍이 이미 유명하면서 바쁜 과학자였다는 점을 간과하고는 한다. 그는 1923년에 라이소자임(lysozyme)을 발견했다. 라이소자임은 침, 콧물, 눈물에 들어 있는 항균 효소로서, 침입하는 병원체에 맞서는 몸의 일차 방어선에 속한다. 그는 아직 그 물질의 특성을 살펴보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몇몇 판본은 그를 어리석거나 무모하다고 묘사하기도 하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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