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가치있는 모든정보

우리몸의 미생물연구, 페니실린의 역사와의 관계 본문

카테고리 없음

우리몸의 미생물연구, 페니실린의 역사와의 관계

알 수 없는 사용자 2021. 12. 15. 06:58

옥스퍼드에서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의 하워드 플로리가 이끄는 생화학자들은 더 효과적인 약물이 있는지 탐색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플레밍의 페니실린 논문을 재발견했다.

 

옥스퍼드에서 그 연구의 책임자는 언스트 체인이라는 괴짜 독일 이민자였다. 그는 기괴할 만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닮았다(수북한 콧수염까지도). 하지만 훨씬 더 도전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체인은 베를린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자랐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영국으로 피신했다. 그는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고, 과학자가 되기 전에는 피아노 협주자로 살아갈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는 까다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성질이 불같았고, 편집증도 살짝 보였다. 물론 1930년대는 유대인이 편집증을 가질 만한 시대였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할 듯하다.

 

연구실에서 중독될지도 모른다는 병적인 두려움을 품었기 때문에, 그는 어떤 발견을 할 만한 인물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을 견디면서 연구를 계속한 끝에, 페니실린이 생쥐의 병원균을 죽일 뿐만 아니라 눈에 띄는 부작용도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다.

 

완벽한 약물을 발견한 것이다. 부수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은 채 표적만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플레밍도 내다보았지만, 문제는 치료에 쓸 수 있을 만큼 페니실린을 대량생산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이었다.

플로리의 요구로 옥스퍼드는 곰팡이를 키우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미량의 페니실린을 추출할 수 있도록 많은 자원과 연구 공간을 제공했다. 

 

1941년 초까지 그들은 겨우 시험할 만큼의 약물을 모아서 앨버트 알렉산더라는 경찰관에게 투여했다. 그는 항생제가 나오기 전에에 인간이 감염에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비극적으로 보여준 이상적인 사례였다.

 

그는 정원에서 장미의 가지를 치다가 가시에 얼굴을 긁혔다. 상처에는 감염이 일어났고 곧 다른 부위로 번졌다. 알렉산더는 한쪽 눈을 잃었고, 이제 정신착란까지 일어나면서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페니실린을 투여하자 기적 같은 효과가 나타났다.

 

이틀 사이에 그는 일어나 앉을 수 있었고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듯했다. 그러나 공급량이 금방 동이 났다. 필사적이 된 과학자들은 알렉산더의 소변을 걸러서까지 최대한 모아서 다시 주사했지만, 결국 나흘 뒤에 페니실린이 동이 나고 말았다. 알렉산더는 재발했고 결국 사망했다.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한창이던 반면에 미국은 아직 참전하지 않은 시기에, 페니실린을 대량생산할 방법을 찾는 일은 일리노이 주 피오리아에 있는 미국 정부의 연구 시설로 옮겨갔다. 연합국 측의 과자들과 유관 단체들은

흙과 곰팡이 표본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비밀리에에 받았다. 수백 군데에서 표본이 왔지만, 전망이 엿보이는 것은 선혀 없었다. 조사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피오리아의 메리 헌트라는 연구원이 동네 채소 가게에서 캔털루프 멜론을 사왔다.

 

그녀가 나중에 회상한 바에 따르면, “예쁜 황금색 곰팡이가 겉에 붙어서 자라고 있었다. 그 곰팡이는 지금까지 시험한 곰팡이들보다 200배 더 강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메리 헌트가 멜론을 구입했던 가게의 이름과 위치는 잊혔고, 역사에 기록을 남긴 그 멜론도 보존되어 있지 않다.

 

곰팡이를 긁어낸 뒤에 직원들이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곰팡이는 살아남았다. 이후로 지금까지 페니실린은 모두 그 우연히 구입한 캔털루프 멜론에 붙어 있던 곰팡이의 후손들에서 나온 것이다.

이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미국 제약사들은 페니실린을 월간1,000억 단위씩 생산했다. 영국의 발견자들은 미국인들이 제조 특허를 받는 바람에 자신들이 발견한 것을 특허료를 내고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에 분통해했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의 아버지로 유명해진 것은 그 우연한 발견을 한 지 약 20년 뒤인 전쟁이 끝날 무렵이었다. 아무튼 그는 대단히 유명해졌다. 

 

전 세계에서 각종 상과 명예 학위를 189번이나 받았고, 심지어 달 분화구에 그의 이름이 붙기도 했다. 1945년에 그는 언스트 체인, 하워드 플로리와 공동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플로리와 체인은 받아 마땅한 대중의 갈채를 결코 받지 못했다. 플레밍보다 사교성이 훨씬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했고, 고집스럽게 응용 연구를 계속한 이야기보다는 우연히 일어난 발견의 이야기가 언론의 입맛에 더 들어맞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체인은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로리가 자신의 공로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믿었고, 드문 일도 아니지만 그래서 우정도 파탄 났다.

플레밍은 1945년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이미 항생제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면 미생물이 내성을 띠는 쪽으로 쉽사리 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정도로 선견지명이 있는 노벨상 연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페니실린의 크나큰 장점인 모든 미생물을 한꺼번에 제거하는 능력은 근본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미생물을 항생제에 더 노출시킬수록 미생물이 내성을 갖추게 될 기회도 더 많아진다. 아무튼 항생제를 투여

하고 나면 가장 내성이 강한 미생물만이 몸에 남는다. 다양한 세균들을 한꺼번에 공격함으로써, 우리는 많은 방어 활동을 자극한다. 동시에 불필요한 부수적 피해까지 일으킨다. 항생제는 수류탄만큼 무차별적이다. 

 

나쁜 미생물뿐만 아니라, 좋은 미생물까지 싹 없앤다. 좋은 미생물 중 일부는 결코 돌아오지 않고 영구적으로 손실된다는 증거가 점점 늘고 있다.

서양 세계의 대다수 시민은 성인이 될 즈음에는 항생제 치료를 받은 횟수가 5-20번에 달한다. 두려운 점은 각 세대가 바로 앞 세대로부터 물려받는 미생물이 점점 줄어들면서, 이 효과가 누적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킨치라는 미국의 과학자만큼 이 문제를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2012년 그가 코네티컷에 있는 예일 대학교 분자발견 센터의 소장으로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열두 살이던 아들 그랜트로부터 몹시 배가 아프다는 연락이 왔다. 킨치는 이렇게 회상한다. 

 

“아들이 여름 캠프로 떠난 첫날이었어요. 컵케이크를 좀 먹었다고 했죠. 그래서 우리는 처음에는 좀 들뜬 상태에서 과식을 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상태가 더욱 안 좋아지는 거예요.” 결국 그랜트는 예일 뉴헤이븐 병원에 입원했는데, 온갖 우려되는 증상들이 빠르게 잇달아 나타났다. 

 

곧 막창자고리(충수)가 터져서 장 미생물들이 배 안으로 탈출함으로써 복막염을 일으켰다.는 것이 드러났다.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도 나타났다. 혈액까지 감염되었고 따라서 온몸으로 퍼질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실망스럽게도 항생제를 네 종류나 투여했는데, 세균의 번식을 막는 데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