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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의 신비, 머리와 그 기능, 몸에 관해서

율남매네아빠 2021. 12. 28. 19:18

“단지 하나의 착상이 아니라, 번뜩이는 영감이었다. 그 머리뼈를 본 순간,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면서 그 아래의 드넓은 평원을 비출 때처럼, 범죄의 본성이라는 문제의 해답이 드러나는 듯했다.” —체사레 롬브로소

사람은 머리가 없으면 살 수 없지만, 머리가 잘렸을 때 정확히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18세기 말에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런 궁금증을 가질 만한 시대였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서 이런 호기심을 품은 이들이 살펴볼 수 있는 막 잘린 머리가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잘린 머리에도 아직은 피에 산소가 얼마간 들어 있을 것이므로, 잘린 즉시 의식을 잃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뇌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에 대한 추정값은 2초에서 7초까지 다양하다. 

 

그런 추정값은 깨끗이 잘린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머리가 늘 그렇게 깨끗이잘리는 것은 아니었다. 머리는 아주 예리하게 벼린 도끼를 건문가가 세차게 휘두른다고 해도 쉽게 잘리지 않는다. 

 

프랜시스 라슨은 그베기의 흥미로운 역사를 다룬 저서 「참수(Severed)」에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머리가 목이 비교적 가늘었음에도, 도끼를 세 번 내리겠을 때에야 바구니로 굴러 떨어졌다고 적고 있다.

처형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는 막 잘린 머리가 의식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한 이들이 많았다. 급진주의 지도자인 장-폴 마라를 살해한 죄로 1793년에 단두대에 오른 샤를로트 코르데는 사형 집행인이 환호하는 군중 앞에 머리를 들어올렸을 때에 격분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라슨의 책에는 마치 머리가 말을 하려는 양 입술을 움직이거나 눈을 깜박이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담들도 실려 있다. 테니에라는 남자는 머리가 몸에서 떨어진 지 약 15분이 지난 뒤에 연설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목격담 중에서 어느 정도가 반사작용이었는지, 또 구전되면서 과장이 얼마나 섞였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1803년에 두 명의 독일 연구자가 조금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이 문제를 조사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머리가 떨어지자마자 뛰어가서 “내 말 들려요?'라고 소리쳐서 의식의 징후가 있는지 조사했다. 어떤 머리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식의 상실이 즉시 이루어지거나, 적어도 너무 빨리 일어나서 측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몸에서 머리만큼 잘못된 방향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거나,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앞에 완강히 버텨온 부위는 또 없다. 19세기는 특히 그런 방향들 쪽에서 볼 때는 황금기와 같았다. 

 

그 시기에 골상학(phrenology)과 두개측정학(cranionctry)이라는 서로 다르면서도 종종 혼동되던 두 분야가 출현했다. 골상학은 머리에 난 혹들을 정신 능력이나 성격 속성들과 연관 짓는 학문이었고, 늘 변두리 학문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두개측정학자들은 기의 예외 없이 골상학이 미친 과학이라고 치부하면서, 그 대안으로 자신들의 헛소리를 내세웠다. 두개측정학은 머리와 뇌의 부피, 모양, 구조를 더 폭넓게 더 정확하게 측정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마찬가지로 얼토당토않은 결론을 내리고는 했다."

역사상 머리뼈에 가장 열광한 사람은 지금은 잊혔지만 당대에는 대단히 유명했던 영국 중부 지방의 의사 바너드 데이비스(1801-1881)였다. 데이비스는 1840년대에 두개측정학에 몰두했고 곧 그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자가 되었다. 

 

그는 『서태평양의 특정 제도 주민들의 특이한 머리뼈」, 『인종별 뇌 무게에 관하여 같은 무거워 보이는 제목의 책들을 잇달아 펴냈다. 이런 책들은 놀랍게도 인기가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부족들의 융합된 머리뼈에 관하여는 15판까지 나왔다. 2권으로 낸 『영국 제도의 머리뼈는 31판까지 찍었다.

데이비스가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자신의 머리뼈를 연구용으로 기증하겠다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 중에는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있었다. 이윽고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머리뼈를 모으게 되었다. 총 1,540점으로, 전 세계의 연구기관에 있는 머리뼈를 전부 더한것보다 많았다.

*두개측정학은 머리뼈학(두개학, craniology)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후자로 쓸 때에는 같은 이름의 지극히 타당한 현대 학문 분야와 구별해야 한다. 현대 머리뼈학은 인류학자와 고고학자가 고대 인류의 해부학적 차이를 연구하고, 법의학자가 회수한 머리뼈의 나이, 성별, 인종을 파악하는 데에 쓰인다.

데이비스는 수집품을 늘리기 위해서 거의 무슨 짓이든 했다.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머리뼈가 가지고 싶어지자. 그는 그곳 원주민의공식 보호자인 조지 로빈슨에게 머리뼈를 골라달라고 편지를 썼다.

 

이 무렵에는 원주민의 무덤을 약탈하는 것이 범죄 행위였기 때문에,데이비스는 원주민의 머리뼈를 꺼내고 대신에 아무 머리뼈나 넣어서의심을 피하라는 등 상세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의 노력은 성공을거둔 것이 분명하다. 곧 그의 수집품에 태즈메이니아인 머리뼈 16점이 추가되었으니까. 게다가 1점에는 몸 전체의 뼈대도 딸려 있었다.

데이비스의 근본적인 야심은 피부색이 짙은 사람들이 옅은 사람들과 별개로 창조되었음을 입증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개인의 지능과 도덕성이 머리뼈의 윤곽과 구멍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져 있으며,그것들이 오직 인종과 계급의 산물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머리뼈가 특이한 사람은 “범죄자가 아니라 위험한 백치”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878년 일흔일곱 살의 나이에 50년 연하의 여성과혼인했다. 그녀의 머리뼈가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른 모든 인종이 열등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유럽 권위자들의이런 본능적인 태도는 설령 보편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해도, 널리퍼져 있었다.

 

1866년 영국의 저명한 의사 존 랭던 헤이던 다운(18281896)은 「백치의 인종 분류에 관한 관찰」이라는 논문에서 오늘날에는 다운 증후군(Down's syndrome)이라고 불리는 증후군을 처음으로보고했다.

 

그러나 그는 그 증후군을 “몽골증(Mongolism)”이라고 했고, 그 증후군을 지닌 이들을 “몽골증 백치(Mongoloid idiot)”라고 했다. 열등한 아시아 유형으로 퇴행하려는 타고난 성향에 시달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운은 백치와 인종이 서로 결부되어 있는 특성들이라고 믿었고, 그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듯하다. 또 그는 "말레이인과 "흑인도 퇴화한 유형이라고 보았다.

 

1861년, 뇌졸중을 겪은 뒤에 여러 해 동안 탕”이라는 음절만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환자를 부검하다가 이마엽에서 언어 중추를 발견했다. 

 

뇌의 한 영역을 특정한 행동과 연관 지은 최초의 사례였다. 그 언어 중추는 지금도 브로카 영역이라고 불리며, 브로카가 발견한 장애는 브로카 언어상실증(Broca's aphasia)이라고 한다. (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말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의미 없는 잡음만 내거나 때로 “내 말은” 또는 “어, 그게 같은 상투적인 어구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브로카는 형질을 파악하는 쪽으로는 덜 명석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모든 증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여성, 범죄자, 피부가 검은 외국인이 백인 남성보다 뇌가 더 작고 덜 영리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 생각과 반대되는 증거가 나올 때마다, 그는 무엇인가 틀림없이 결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무시했다. 독일에서 독일인이 프랑스인보다 뇌가 평균 100그램 더 무겁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때에도 믿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검사한 프랑스인들이 아주 나이가 많은 이들이어서 뇌가 쭈그러든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 껄끄러운 결과를 설명했다. “노년이 뇌에 가할 수 있는 퇴행의 정도는 아주 다양하다.” 또 그는 처형된 범죄자들 중에 뇌가 큰 이들이 종종 있다는 사실도 설명하기가 어려웠는데, 목이 매달릴 때의 스트레스로 뇌에 충혈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겪은 가장 큰 모욕은 그의 사후에 뇌의 크기를 쟀더니 평균보다 더 작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에 대한 연구를 마침내 타당한 과학적 토대처럼 보이는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생리학자인 체사레 롬브로소(1835-1909)가 범죄 인류학(criminal anthropology)이라는 비슷한 이론을 주창했다.

 

롬브로소는 범죄자들이 진화적 격세유전(隔世遺傳)의 산물이며, 다양한 해부학적 특징들을 통해서 범죄 본능을 드러낸다고 믿었다. 이마의 기울기, 붙거나 늘어진 귓불 모양, 심지어 발가락 사이의 간격도 그런 특징이었다.

 

(그는 발가락 간격이 넓은 이들은 유인원에 더 가깝다고 설명했다.) 그의 주장들이 털끝만큼도 과학적 타당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널리 존경을 받았으며 심지어 오늘날 현대 범죄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고는 한다. 롬브로소는 법정에 전문가 증인으로 종종 출석했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인간에 대한 오해(The Mismeasure of Man)』에서 인용한 사례를 보자. 롬브로소는 두 용의자 중에서 여성을 죽인 살인자가 누구인지 판단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한 명이 범인임이 자명하다고 선언했다.

 

“턱, 이마굴, 광대뼈가 크고, 윗입술이 얇고, 앞니가 크고, 머리가 유달리 크고, 왼손잡이에다가 촉각이 무디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인지 아무도 몰랐다는 점과 그 딱한 사람에게 불리한 실제 증거가 전혀 없었다는 점 따위에는 신경 쓰지 말라. 그 남자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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